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조르게 (문단 편집) === 간첩이 되다 ===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에 의해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어 신문기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는데, [[1921년]]에 그는 옛 스승 알베르트 게어라흐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네와 결혼을 했다. 이후 여러 공작에 가담하였고, [[1924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소련의 첩보기관인 국가정치부에서 정보분석자로 일했다. 그는 일 때문에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이혼했다. [[192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소련군의 제4국(GRU, 군사정보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이 부서의 요원으로 일했다. 그는 같은 해에 영국으로 파견되어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독일로 가서 좌익 활동에 연루되지 말고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받고 이에 따랐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농업신문인 도이체 게트라이데차이퉁(Deutsche Getreide-Zeitung)에 기자로 취직하였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화민국/국민정부|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를 만나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尾崎秀実)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